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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근에서 받은 책이 정리된 것 같지 않은 상태

2026-10-04 15:41:09 조회 3 댓글 0 추천 0 글 신고 0

당근에서 받은 책이 정리된 것 같지 않은 상태였는데, 솔직히 “포장만 잘 오면 됐지” 하고 넘겼던 내 잘못이 좀 컸어요. 택배 박스 열자마자 책 냄새보다 먼저 올라온 건 뭔가… 정리 안 된 서랍을 뒤집었을 때 나는 그 특유의 기분이었습니다.

거래할 때 판매자님이 “상태 괜찮아요, 사진 그대로예요”라고 하셨거든요. 저는 사진에서 딱딱 정돈된 느낌만 봐서, 오자마자 선반에 꽂으면 끝일 줄 알았어요. 그런데 박스를 열어보니 책들이 한 권 한 권 정리됐다기보단, 그냥 “있던 것 중 살아남은 것들”처럼 모여 있더라고요.

책 사이사이에 메모지가 끼어 있었는데, 그 메모지가 전부 “언젠가 다시 읽자” 같은 다짐 문장들이었어요. 그런데 다짐 문장들이 너무 열정적이라서 문제는 아니고, 글씨체가 전부 다른 사람이 쓴 것처럼 제각각이었단 게 웃겼어요. 한 권에서는 빨간 펜으로 동그라미 쳐놓고, 옆 권에서는 연필로 밑줄만 긋고, 또 다른 권에서는 스티커가 붙어 있고요. 마치 한 권당 다른 캐릭터가 관리하다가 각자 퇴근한 느낌.

그리고 제일 충격은 책 모서리 상태가 아니라, 책들 사이에 끼워진 “보관용 종이”들이었어요. 어떤 책엔 영수증이 끼어 있었고, 어떤 책엔 지도 조각 같은 게 들어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전부 날짜가 적혀 있더라고요. 그러니까 이 책들이 그냥 읽히기만 한 게 아니라… 각 권이 누군가의 일상을 통째로 통과해 온 거죠. 저는 그걸 보면서 ‘이건 책을 산 게 아니라 타임캡슐을 산 거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일단 대충 정리해보려고 펼쳤는데, 그 순간부터 책이 제 생활을 방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책은 페이지 중간에 접힌 종이가 있었고, 그 종이를 빼려다 보니 종이가 아니라 쿠폰처럼 생긴 걸 같이 뽑아버렸어요. 뽑아버린 쿠폰이 또 되게 깨끗하게 보관돼 있는 게 더 웃겼습니다. 깨끗하다는 건, 누군가가 진짜 조심조심 넣어뒀다는 뜻이잖아요. 그런데 왜 책은 정리가 안 된 걸까요. 넣어두는 건 성실한데 정리하는 건 아닌… 그런 생활 루틴이 있는 사람인가 봐요.

여기서부터는 제가 책장 정리 모드로 완전히 빠졌습니다. “그래, 한 권씩만 확인하면 되겠지” 했는데, 확인하는 순간마다 새로운 흔적이 나와요. 페이지마다 표시가 달라서 같은 책이라도 읽는 사람이 매번 달라질 수밖에 없는 구조더라고요. 어떤 건 형광펜이 넓게 퍼져 있고, 어떤 건 점 하나만 찍혀 있고, 어떤 건 여백에 문장이 적혀 있어요. 저는 그러면서 점점 궁금해졌어요. 이 책들이 한 번 읽히고 끝난 게 아니라, 여러 번 “어떤 사람이 그날 컨디션으로 표시를 남기고” 다시 누군가가 이어서 읽은 걸까요?

판매자님께서 “정리된 상태로 보내드릴게요”라고 하셨는데, 저는 여기서 ‘정리’의 기준이 다르다는 걸 확실히 깨달았습니다. 저는 책을 세로로 꽂아두고 ‘보기 좋게’ 정리하는 걸 생각했는데, 판매자님은 아마 “내용 기준으로 정리”하신 걸지도 몰라요. 즉, 책 자체는 내용이 정리돼 있다는 뜻… 그런데 문제는 그 정리가 종이 사이에 묻어나서 제 책상 위로 하나둘씩 나오고 있다는 거예요. 제 책상엔 어느 순간 작은 문서들이 늘어나더니, 결국 저는 책상 한 켠을 임시 보관함처럼 만들고 말았습니다.

그 와중에 사진처럼 책이 깔끔하게 포장되어 도착한 건 또 사실이에요. 겉으로는 다 멀쩡해 보이는데, 속에서 ‘왜 이걸 여기에 넣었지?’ 싶은 것들이 계속 발견되는 타입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결론을 내렸어요. 이건 책이 더러워서가 아니라, 책이 너무 열심히 살아온 흔적이 있어서 정리된 것처럼 보이지 않는 거라고. 열심히 산 흔적은 보통 정리 정돈을 방해하니까요. 살아있는 책… 그런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요.

마지막으로 다 정리하고 나서 책장에 꽂아봤는데, 이상하게도 그 흔적들이 다 사라지진 않더라고요. 어떤 책은 여전히 종이 끼우는 맛이 남아 있고, 어떤 책은 페이지가 살짝 굽어 있어요. 그게 또 보기 싫지는 않더라고요. 오히려 누군가의 읽는 방식이 남아 있다는 게 느껴져서, 제가 그다음 독자로 이어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당근에서 책을 사는 건 결국 ‘책’을 사는 게 아니라, 그 책이 거쳐온 생활을 한 번 더 가져오는 거였나 봐요. 그래서 오늘도 책장 한 칸이 비어 있는데… 다음 거래 알림 뜨면 그 칸이 또 채워질까 봐, 저는 이미 약간 무서워요. 웃긴 건 그 무서움이 설렘이라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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