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 최신글
유머/짤방 유머 추천 0

자취방에서 물 끓이다 태풍처럼 쏟아진 날

2026-10-08 15:41:13 조회 0 댓글 0 추천 0 글 신고 0

자취방에서 물 끓이다 태풍처럼 쏟아진 날. 그날도 별거 없을 줄 알았어요. 평소처럼 물 틀어놓고, 라면 스프는 미리 뜯어두고, 유튜브에서 “자취 꿀팁” 같은 거 보면서 손이 저절로 바쁘게 움직이던 날이죠. 근데 제 인생이 갑자기 시트콤으로 바뀌는 건, 딱 그 순간부터였습니다.

처음엔 진짜 사소했어요. 냄비에 물 붓고 전기포트처럼 뭔가 자동으로 조절되는 줄 알고 안심한 제 자신이 문제였죠. 불은 켜져 있었고, 물은 끓기 시작했는데 저는 “곧 라면 넣으면 되겠네” 하고 휴대폰을 만지작거렸습니다. 그때까지는요. 끓는 소리가 뽀글뽀글하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뭔가… 웅웅 거리는 소리가 아니라, 마치 엔진 시동 걸리듯 배경음이 커지더라고요.

물은 분명 냄비에서만 놀아야 하는데, 제 방은 어느새 ‘과학 실험실’이 됐습니다. 거품이 올라오더니 넘칠 듯 말 듯하다가, “야 이 정도면 괜찮지?” 싶을 때 바로 그 타이밍에 사고가 납니다. 뚜껑도 아닌데, 끓는 물이 냄비 가장자리에서 툭툭 튀는 게 아니라 한 번에 확 밀려나오는 느낌이었어요. 저는 그걸 태풍이라고 부르기로 했습니다. 이름을 붙이는 순간 이미 수습이 아니라 감상 모드가 되더라고요.

소리는 제일 먼저 들렸습니다. “쾅!” 같은 폭발음이 아니라, 기압이 무너지는 소리랄까요. 물이 쏟아지면서 바닥에 닿는 순간, 그 찰나의 반짝임이 눈에 남아요. 그리고 그 다음은 행동이었죠. 정신없이 휴지를 집어 들고 달려갔는데, 문제는 바닥이 아니라 제가 앉아 있던 곳 주변 전체가 이미 젖고 있었다는 겁니다. 특히 책상 아래는 예외 없이 젖었고, 전원 멀티탭도 생각보다 가까워서 심장이 잠깐 멎는 줄 알았어요.

여기서 진짜 자취인의 비극이 시작됩니다. 수건은 어딨더라? 휴지는 또 어디다 뒀더라? 이런 질문을 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데, 물은 이미 확실히 계획을 세웠는지 계속 번져요. 냄비에서 시작한 물길이 주방 타일을 타고 골목길처럼 퍼져서, 제 슬리퍼 앞까지 딱 밀려왔습니다. 저는 물이 왜 이렇게 ‘길을 아는지’도 신기했어요. 마치 “여기 사람이 사는 동선이네?” 하고 학습한 것 같았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제가 그날따라 바닥에 깔아둔 러그가 없었다는 점이었어요. 대신 대신… 이미 젖어버린 것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라면 건조대 위에 있던 젓가락 통은 한쪽만 젖어서 “나 괜찮아” 하는 얼굴로 축 처져 있었고, 싱크대 아래 서랍은 습기 냄새가 올라오기 시작하더라고요. 그리고 가장 얄궂은 건, 라면을 끓일 생각으로 꺼내 둔 계란이 조금 튀긴 물방울에 닿았다는 사실. 안 깨진 게 천만다행인데, 그걸 확인하는 손이 왜 그렇게 떨렸는지 아직도 기억나요.

결국 저는 불을 끄고, 환기를 하고, 바닥을 닦고, 다시 전기 장치를 점검하고… 이 과정을 ‘구급요원 모드’로 30분쯤 돌렸습니다. 그 와중에 라면은요? 네, 당연히 라면은 이미 물이 너무 많이 튀어서 타이밍을 놓쳤죠. 물은 넘쳤고, 저는 그걸 닦느라 라면을 못 넣었어요. 그래서 결과는 “태풍 경험”이었습니다. 라면은 나중에 다시 끓였는데, 맛이 어쩐지 더 평범했어요. 그 평범함이 오히려 더 기억에 남더라고요. 인생이 갑자기 거창해지는 것보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게 더 무섭다고 해야 하나요.

다음 날 아침, 저는 물이 퍼진 흔적을 찾으려고 바닥을 훑었습니다. 타일 틈새로 스며든 건지, 아직도 희미한 얼룩이 남아 있더라고요. 괜히 하이라이트처럼 깔끔하게 정리하려고 닦다가 더 번질까 봐 멈칫했는데, 그때 거실 쪽에서 바퀴 달린 의자가 제자리에서 미끄러지듯 굴러가요. 그 소리에 놀라면서도 한편으론 웃음이 나왔습니다. “어제의 태풍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나?” 싶어서요. 근데 자세히 보니 그냥 제가 깔아둔 컵 받침이 젖어서 바닥에 달라붙었다가 떨어진 거였어요. 태풍은 끝났고, 제 뇌가 아직도 재난 영화 자막을 켜둔 거죠.

그래도 가장 웃긴 건, 그날 이후로 제가 냄비 옆에 붙어 서 있는 시간이 생겼다는 거예요. 끓는 소리가 들리면 “아 이제 다 됐겠지”가 아니라, “넘치지 않게 지금 여기 있어야 한다”로 사고가 바뀌었습니다. 자취방에서 배운 교훈은 거창하지 않아요. 물은 생각보다 쉽게 판을 바꿔버리고, 내가 바빠 보일수록 사고는 조용히 준비를 끝낸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태풍은 하늘에서만 오는 게 아니라… 주방에서도 잠깐 들르게 된다는 거죠. 그 뒤로 라면 끓일 때는 냄비를 잠깐이라도 외면하는 순간부터 괜히 마음이 두근두근합니다. 오늘도 물이 보글보글 끓으면, 저는 왠지 모르게 다짐을 해요. “이번엔 진짜로 한 방울만, 딱 그 정도만.”

이 글 반응 남기기
추천과 비추천은 회원당 1회만 가능하며, 다시 누르면 취소됩니다.
추천 0 · 비추천 0
글 신고 안내
같은 회원은 같은 글이나 댓글을 1회만 신고할 수 있으며, 누적 신고가 5회 이상이면 자동으로 숨김 처리됩니다.
현재 글 신고 0회

댓글

댓글 작성은 로그인 후 가능합니다.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