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사가 ‘내가 먼저 가볼게’ 말하곤 사라짐
오늘도 회의 끝나고 잡담 한마디 하려던 찰나, 상사가 “내가 먼저 가볼게”라고 말하더니 그 다음부터 그냥 사라졌습니다. 진짜로요. 제가 멍하니 있다가 자리 돌아보니까 노트북 덮는 소리도 없고, 물컵 들고 일어나는 기색도 없고, 화면에 띄운 일정표만 덩그러니 남아 있더라고요.
상사라는 사람은 원래 말이 짧은 편인데, 그날은 유난히 확신에 찬 표정이었어요. 제가 “네, 다녀오세요”라고 인사도 하기 전에 이미 제 쪽 시선은 한 번 스치고 다른 방향으로 사라진 느낌. 순간 제 머릿속에는 ‘어… 혹시 제가 이해를 못 한 건가?’ 같은 생각이 들었죠. 그런데 그게 시작이었습니다.
회의실 문 닫히는 소리는 들렸는데, 상사가 나갔다는 걸 알 리가 없는 상황이었거든요. 왜냐면 회의 주제는 “이번 주에 꼭 처리해야 하는 건”이었는데, 상사는 그걸 정리하면서 제게 할 일도 정확히 말해줬거든요. “너는 이거 보내고, 나는 저거 확인하고 올게.” 그러고는 방금 말한 그 한마디, “내가 먼저 가볼게”를 던지고 휙. 확인은 커녕 출근도 했는지 의심될 정도로 흔적이 없었어요.
저는 일단 태연한 척 사내 메신저를 켰습니다. 상사 프로필을 보며 보냈죠. “지금 이동 중이신가요?” 답장은 오지 않았고, 그 다음엔 “혹시 외부 미팅인가요?”도 보냈는데 역시 무응답. 시간은 생각보다 빨리 흘러서, 옆 자리 동료가 “야, 상사 아직도 안 보이냐?”라고 묻는 순간부터 제 멘탈이 조금씩 흔들렸습니다.
동료는 툭 던지듯 말했어요. “아마 그 말 뜻이 ‘내가 먼저 가볼게’지. 너는 다음으로 오면 돼.” 농담인지 진담인지 애매한 톤이었는데, 그게 오히려 더 찝찝했습니다. 왜냐면 상사는 늘 일정을 촘촘히 잡는 사람이거든요. 그러면 보통 ‘나갔다 올게’ 정도면 최소한 어디로 가는지, 언제쯤 돌아오는지 정도는 남겨야 정상이죠.
그래서 제가 결국 사무실 전체를 돌아다니며 물어봤습니다. 팀장님은 “아, 그 사람?” 하더니 어깨를 한번 으쓱. 다른 팀도 “오늘 외부 일정 있지 않았나?”라고 말만 바꿔가며 흘렸고, 저는 점점 이상한 결론으로 가고 말았어요. 상사가 ‘먼저 가볼게’라고 말한 순간, 이미 회사를 통과해서 다음 미팅 장소로 넘어간 건가? 하는 결론요. 제가 뭐 교통카드 찍는 단계에서 탈락한 느낌이랐죠.
한참 뒤, 상사에게서 드디어 메시지가 왔습니다. 내용은 딱 한 줄. “정리 다 됐어. 너도 바로 넘겨.” 그런데 제가 받은 ‘정리’는 어디에도 없었어요. 메일함에도 없고, 공유 문서에도 없고, 회의록 메모에도 없고, 심지어 제가 열어둔 일정표 옆 노트에도 아무 흔적이 없었습니다. 저는 그 메시지를 보면서, 이게 공지인지 명령인지, 아니면 그냥 제시간에 맞춰 혼자 놀라라고 던진 건지 고민하게 됐어요.
동료들이 저를 보면서 “너 상사한테 뭐 들었냐?”라고 묻길래, 저는 최대한 웃으면서 “아… 정리 다 됐대요”라고 답했죠. 그 말 하는 순간 제 표정이 너무 공손해서, 누가 봐도 ‘저 지금 당황 중입니다’가 티가 났을 겁니다. 동료 중 한 명이 그제야 제대로 웃더니, “그럼 너도 ‘내가 먼저 가볼게’ 해봐. 상사가 바로 나타날걸?”라고 하더라고요.
그 말이 진짜인지 확인하고 싶었어요. 저는 상사 자리 쪽으로 가서 조용히 혼잣말을 했습니다. “저도 먼저 가볼게요.” 그런데 아무 일도 안 벌어졌습니다. 상사는 여전히 안 보이고, 저는 여전히 보고서를 붙잡고 있고, 시간은 또 흘러가고… 결국 저는 그날 밤 퇴근하기 직전에야 이해했어요. 상사가 사라진 게 아니라, 제가 그 말의 속뜻을 놓친 거더라고요.
상사가 “내가 먼저 가볼게”라고 말할 때, 그건 이동을 뜻하는 게 아니라 ‘너는 알아서 처리해’라는 암호에 가까웠던 겁니다. 다녀오는 사람은 상사가 맞는데, 제 시간표는 상사가 아니라 제 업무가 먼저 도착하는 방식이었죠. 그리고 그 암호를 풀려면 보통 여러 번 당해봐야 하더라고요. 오늘도 상사가 “내가 먼저 가볼게” 하면, 저는 속으로만 대답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이번엔 제가 먼저요… 아니, 다음에요.” 그러고는 또 퇴근 시간이 오겠죠. 어쩌면 그게 제일 빠르게 돌아오는 방법일지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