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이 나 대신 장 본다고 한 약속
동생이 나 대신 장 본다고 한 약속은, 솔직히 “괜찮겠지?” 하고 믿었던 내가 젤 문제였습니다. 그날 나는 회사 끝나자마자 배달 앱만 만지작거리던 상태였고, 동생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한마디 툭 던졌어요. “형, 오늘 장은 내가 봐줄게. 형은 그냥 쉬어.” 그 말 한 번에 나는 마음이 아주 편해져서, 냉장고를 확인하는 대신 소파에 반쯤 몸을 맡겼죠.
동생은 늘 꼼꼼한 편이긴 한데, 문제는 ‘꼼꼼함’이 장 볼 때도 그대로 적용되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약속 시간은 저녁 7시. 나는 6시 50분부터 현관 앞에 나와서 택배 오는 사람처럼 귀를 쫑긋했어요. 7시가 되자마자 “형, 도착했어!” 하고 연락이 왔고, 나는 바로 현관문 열었죠. 문 너머에서 종이봉투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는데, 뭔가… 무게감이 느낌이 이상했어요. 너무 무겁지도, 너무 가볍지도 않은데, 뭔가 ‘사연’이 있을 것 같은 소리랄까요.
봉지를 받으면서 나는 괜히 의젓하게 말했어요. “그래, 뭐 샀는데?” 동생은 씩 웃더니 “일단 형이 좋아하는 거 위주로!”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집에 들어오기도 전에 봉투에서 먼저 튀어나온 건 파프리카가 아니라 오리엔탈 드레싱이었어요. 비슷한 병이 여러 개. 그리고 옆에 있던 건 김치도 아니고, 샐러드용 소스랑 크루통이 세트로 들어있는 거더라고요. 나는 그걸 보자마자 입이 자동으로 닫혔습니다. “아니, 장 본다면서 왜 갑자기 샐러드 연구를…?”
나는 그래도 참고 냉정하게 체크를 시작했어요. 동생이 말한 대로 ‘기본 장’이 들어있나 보려고요. 그런데 냉장칸을 열자마자 또 이상한 게 나왔습니다. 양파, 마늘, 대파 같은 건 분명히 있어요. 근데 고기는요? 생선은요? “형 단백질은 어디 있어?”라고 묻기도 전에, 동생이 뒤에서 “형, 고기는 내가 다음에 더 잘 사줄게. 오늘은… 다이어트 장이야!”라고 하더라고요.
저는 순간 멍해졌어요. 다이어트라니, 나 요즘 다이어트 한다고 말한 적 없는데요. 오히려 나는 동생이 그런 말 할 때마다 “형은 먹는 게 운동이야” 같은 소리를 하던 사람이었거든요. 근데 동생은 또 과감하게 설명을 이어갔습니다. “형이 요즘 배달 많이 시켜서, 내가 돈 아껴주려고… 배달 대신 샐러드 만들어 먹으면 되잖아. 그리고 드레싱이랑 크루통은 실패가 없다고 사람들이 그러더라.”
여기서 포인트는 ‘사람들’이 누구냐는 거였는데, 그 질문을 꺼내기도 전에 동생이 자기 방식의 논리를 펼쳤습니다. “형, 라면은 장에 안 넣었어. 라면은… 손이 나가니까.” 그러면서 식탁에 라면 대신 올려놓은 게 통밀빵이랑 시리얼이었어요. 게다가 우유는 샀는데, 카트에 있던 걸 계산해보면 우유 1개가 아니라 우유 2개 그리고 무가당 요거트까지… 장 본다더니 식단표를 들고 온 느낌이었습니다.
그래도 나는 형답게(라고 쓰고 성격 참는 중이라고 읽음) “그럼 김치나 기본 반찬은?” 했죠. 동생은 “김치는… 인터넷 후기 보고 샀는데, 형이 좋아할지 모르겠어서 작은 거로.” 그러면서 김치 통을 내놨는데, 작은 게 맞긴 맞더라고요. 근데 작은 이유가 있었어요. 김치가 아니라 깍두기였고, 게다가 깍두기가 한 통이 아니라… 깍두기 컵이었습니다. 한 입 크기의 반찬용 컵. 내가 밥 먹을 때 한 번에 다 먹는 스타일은 아닌데, 동생은 그걸 전혀 모르고 있었던 거죠.
결국 나는 동생 장을 받아서 식탁 차리는데, 그 순간 깨달았어요. 이건 장이 아니라 “동생이 생각한 미래의 내 모습”을 사 온 거였습니다. 나는 동생한테 따뜻하게(?) 말했어요. “야, 장은 나중에 너한테 맡기기 전에 한 번만 확인하자. 다음엔 최소한… 단백질이 어디에 있는지부터.” 동생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갑자기 조용히 한 마디 더 합니다. “근데 형, 내가 단백질도 샀어. 근데 그건… 지금 냉동칸에 넣어뒀어.”
냉동칸 문을 여는 순간, 나는 진짜로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냉동실 한가득이 고기였던 게 아니라, 작은 닭가슴살 패키지가 수십 개처럼 꽂혀 있었거든요. 동생은 “형이 닭가슴살 싫어하는 건 알아. 근데 요즘은 양념된 것도 많잖아. 맛있을 거야. 그리고 유통기한도 넉넉해.” 이 말을 하는 동생의 얼굴은 너무 진지해서, 나는 웃어야 하는데 웃으면 안 되는 기분이었어요. 그래서 그냥 “그래, 다음엔 그 닭가슴살이랑 어울리는 소스도 한 번 물어보고 사자….” 하고 넘어갔습니다.
밤이 되고 나는 결국 닭가슴살을 꺼내서 접시에 올려두고, 오리엔탈 드레싱을 뿌려 샐러드를 만들었습니다. 솔직히 맛은 나쁘지 않았어요. 문제는 그 맛이 아니라, 내가 동생에게 장을 맡기면 내 저녁이 갑자기 다큐 영화처럼 바뀐다는 사실이죠. 그래도 한편으로는 기분이 좋았습니다. 동생이 날 신경 쓰는 방식이 서툴긴 해도, 분명히 ‘대충’이 아니라 ‘진짜로’ 해보려는 노력이 있더라고요. 다음에 또 “형, 나 장 봐줄게”라고 하면… 나는 귀찮아도 한 번만 물어볼 생각입니다. 대신, 질문은 딱 하나. “그 장에 라면은 없어도 되는데, 우리 집 계량컵은 왜 샀냐?” 이런 걸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