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에게 들킨 내 당근 구매 리스트
연인에게 들킨 내 당근 구매 리스트… 생각보다 빨리, 그리고 생각보다 디테일하게 털렸다. 어느 날 퇴근하고 들어오자마자 “여보, 당근 좀 그만해요”라는 말이 날아오는데, 그 톤이 너무 평온해서 오히려 무서웠다. 나는 대충 “지나가던 물건이 있더라고요”라고 둘러댔고, 그녀는 아무 말 없이 휴대폰을 내 쪽으로 돌렸다.
화면에는 내가 최근에 올린 게 아니라, 내가 구매한 기록이 쭉 떠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구매 리스트를 ‘필요해서 산 것들’로 분류해두고 있었거든. 근데 그 분류가 연인의 눈에는 그냥 “당근으로 뭘 쌓아두고 있나”로 보였던 거다. 그녀가 첫 번째로 집어든 건 미니 선풍기였는데, 문제는 “여름용”이라고 적어둔 내 채팅 메모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는 점.
“여름용이면 지금도 여름이잖아요?”라고 변명했더니, 그녀가 한숨을 쉬면서 다음 물건을 보여줬다. 공기청정기를 산 지 한 달도 안 됐는데 또 냄새 제거제를 샀더라. 나는 미세먼지 시즌이랑 반려식물 냄새를 동시에 잡으려던 계획이었다고 했는데, 그 말이 설명으로는 안 먹히고 변명으로만 들렸는지 표정이 굳었다.
그 다음은 더 치명적이었다. 작은 스팀다리미를 샀는데 판매자와 주고받은 메시지에 “셔츠 주름 완전 잡는 버전” 같은 문장이 남아 있었다. 나는 그 문장이 ‘구매 욕심’을 표현한 게 아니라 ‘기대’라고 해명했지만, 그녀는 “기대가 아니라 집착 같은데요?”라고 했다. 그 순간부터 내 변명은 공기청정기 필터처럼 점점 효율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리스트를 넘기다가 멈춰서 “이건 뭐예요?”라고 물었다. 책상 위 조명. 그것도 밝기 단계가 3단짜리인데, 채팅으로 “3단이면 밤에도 딱 좋죠”라고 써놨더라. 나는 재택근무가 늘어서 눈 보호용으로 산 거라고 했는데,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며 “그러면 왜 ‘딱 좋죠’라고까지 써요? 조명이 날 꼬시나요?”라고 했다. 조명이 내가 아니라 그녀의 마음을 건드리는 것처럼 느껴져서 더 억울했다.
여기서 멈추면 좋았을 텐데, 연인은 “자, 마지막으로 제일 웃긴 거”라는 표정으로 가장 아래를 보여줬다. 접이식 빨래 건조대와 빨래 집게 세트, 그리고 곰팡이 방지 스프레이까지 한 번에 들어간 내 구매 흐름. 나는 “한 번에 사면 배송비 아끼잖아요”라고 설명했는데, 그녀는 “배송비 아끼는 마음은 이해하는데, 왜 마음이 ‘곰팡이와의 전쟁’을 선포하는 느낌이에요?”라고 말하더라. 그 말이 너무 정확해서 내가 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물건’이 아니라 ‘장바구니 심리’였던 것 같다. 당근 특유의 판매자 말투, 가격 비교, 빠른 거래, 그리고 내가 하나씩 ‘필요하다’고 붙여가며 설득했던 그 과정이, 그녀에게는 그냥 “나는 내 취미를 숨기고 있어요”로 보였던 거다. 그녀는 “당근이 나쁜 건 아닌데, 왜 말 안 했어요?”라고 묻고, 나는 “말하면 잔소리할 것 같아서요”라고 솔직하게 답해버렸다. 그 한마디가 분위기를 완전히 얼려버렸다.
그래서 나는 급하게 ‘수습 모드’를 켰다. 다음 날 아침에 그녀 앞에서 구매 리스트를 다시 펼쳐 놓고, 하나씩 “이건 생활 개선, 이건 편의, 이건 시간 절약”이라고 라벨을 붙이듯 설명했다. 대신 약속도 했다. 앞으로는 새로 사기 전에 “이거 하나만 괜찮아요?”라고 미리 묻겠다고. 그녀는 잠깐 생각하더니 “좋아요. 대신 다음엔 선풍기부터가 아니라… 우리 집에 필요한 걸 같이 고르자요”라고 했다. 그 말이 그렇게 달콤할 줄 몰랐다.
그리고 반전이 한 번 더 있었다. 그날 밤 그녀도 당근을 하다가 “나도 리스트 있긴 해요”라며 내 휴대폰 옆에 조용히 화면을 띄운 거다. 근데 그녀의 구매 목록 맨 위에는 고양이 캣닢이 있었다. 나는 웃음이 나와서 “이건 또 뭐예요”라고 했고, 그녀는 태연하게 “당신이 말을 안 들을 때 효과가 있대요”라고 했다. 결국 우리는 둘 다 들켰고, 서로의 리스트를 보며 싸우는 대신 한 박자 쉬어가는 법을 배운 셈이다. 당근은 원래 빨리 오잖아, 근데 관계는… 한 번 들키면 더 빨리 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