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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 정리하다가 유통기한 찾은 순간

2026-10-28 10:41:10 조회 1 댓글 0 추천 0 글 신고 0

냉장고 정리하다가 유통기한 찾은 순간, 그날의 저는 “이왕이면 깨끗하게 비워야지”라는 성인군자 모드로 시작했어요. 휴지 한 장 꺼내고 지퍼백도 준비하고, 심지어 멘탈까지 맑게 하려고 오렌지 향 나는 손세정제까지 썼죠. 문제는 냉장고가 저를 시험에 들게 했다는 겁니다.

처음엔 별거 아니었어요. 소스류, 반찬 통, 음료수 라인 쭉 훑고 “여긴 멀쩡하네” 하면서 기분 좋게 손잡이를 쥐었죠. 그런데 냉장고 안쪽, 사람 손이 잘 안 들어가는 그 구석에 뭔가가 있더라고요. 투명한 용기였는데, 뚜껑에 스티커가 붙어 있고 글씨가 아주 당당하게 남아 있었어요. 유통기한이 아니라 유통기한 “찾음”의 느낌이랄까요.

저는 원래 확인을 하면 마음이 편해지는 타입이라, 스티커를 한 번에 읽으려고 용기를 들어 올렸습니다. 그 순간 손가락이 미세하게 미끄러지더니, 용기 바닥에 얇게 굳어 있는 게 보였어요. 색은… 음, 자연 다큐에서나 나올 법한 브라운 계열이었고요. 제 뇌는 동시에 두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아 이건 버려야지”와 “근데 이게 대체 뭔데?”

바로 직전 기억을 떠올리는데, 냉장고 정리하는 날마다 항상 그 질문이 나오더라고요. “내가 언제 이걸 샀지?” 저는 가끔 장을 보면서도 영혼을 반쯤 잃고 사는 편이라, 통상적인 상식이 안 먹힐 때가 있어요. 그래서 용기를 흔들어보려다 말았습니다. 흔들면 냄새가 더 퍼질 것 같아서요. 대신 라벨을 다시 봤는데, 거기 적힌 날짜가… 지금 기준으로 완전히 다른 시대였습니다.

진짜로요. 숫자가 달라진 게 아니라, 그 숫자가 제 삶의 시간축과 분리되어 있었어요. 저는 그 자리에서 “이게 1년 전 음식이야?”라고 묻는 대신, “이게 1년 전 내가 누구였지?” 같은 철학 질문을 시작했죠. 주변은 조용했는데, 제 마음속에서는 종소리가 울리는 것 같았습니다. ‘정리’는 결국 ‘증거 확보’였다는 결론에 도달했어요.

그 다음 행동은 뭐냐면… 당연히 버리는 거죠. 저는 쓰레기통 앞에 서서 용기를 들고 주저했어요. 주저한 이유는 딱 하나, “이게 혹시 내가 만든 거야, 아니면 누군가가 준 거야?”라는 미련 때문이었습니다. 냉장고는 물건을 담는 곳이 아니라, 제 기억의 빈칸을 보관하는 곳이더라고요. 결국 저는 “모르는 건 먹지 않는다”라는 교과서 문장으로 마음을 다잡고 과감히 봉투에 넣었습니다.

근데 이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용기를 치우니까,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작은 통이 눈에 들어왔어요. 뚜껑 위에 또 스티커가 있었는데, 이번엔 날짜가 두 줄로 적혀 있더라고요. 하나는 유통기한, 하나는 뭔가… 손글씨로 “먹기 전”이라고 적혀 있었어요. 저는 그 순간 웃음이 나왔습니다. “먹기 전”을 유통기한 옆에 붙인 사람이 있다면, 그건 요리 실력 이전에 의지력의 문제였겠죠.

그러고 나서 저는 본격적으로 정리 모드로 들어갔어요. 야채칸, 소스 칸, 냉동실로 이어지는 동선이 갑자기 다큐멘터리처럼 변했습니다. 하나씩 확인하다가, “아 이건 아직 괜찮네” 하면 어깨가 풀리고, “어? 이건…” 하고 걸리면 표정이 굳고 손이 빨라지더라고요. 냉장고 정리는 청소가 아니라 탐정 놀이였어요. 제 냉장고는 범죄 현장이고 저는 증거를 모으는 사람 같았고요.

마지막에는 생각보다 많이 버려서, 냉장고 문을 닫는 소리가 유난히 가벼웠습니다. 그동안은 음식이 남아 있어서 마음이 찜찜했는데, 이제는 공간이 넓어지니까 이상하게 마음도 같이 정리되는 기분이 들더라고요. 근데 진짜 웃긴 건, 다시 정리 다 하고 나서 맨 앞 칸에 새로 산 도시락을 올려두는데… 그 위에 붙어 있던 포장 스티커가 눈에 띄었다는 거예요. 날짜가 선명하게 적혀 있었고요. 저는 속으로 “이번엔 진짜로 체크한다”라고 다짐했죠.

그리고 그날 밤, 냉장고 문을 닫는 제 손끝에서 또 한 가지 깨달음이 스쳤습니다. 유통기한을 찾는 순간은 먹기 전에 한 번만 일어나는 게 아니라, 내가 앞으로도 계속 잊지 않게 만드는 장치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결론은 이거예요. 냉장고가 저를 감시하는 게 아니라, 제가 저를 관리하려고 일부러 유통기한을 숨겨두는 거였다는… 뭐 그런 결말로요. 다음 정리 날에도 저는 또 “어? 이건 언제부터 있었지?”를 시작으로, 아주 성실하게 인간을 포기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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